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
7일 오후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는 이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후위기비상행동을 비롯한 615개 단체로 구성된 907 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가 연 ‘907 기후정의행진’ 본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의 목소리다.
이날 서울 낮 최고기온은 32도까지 올랐다. 늦더위가 이어진 날씨였지만 이날 행사에는 주최측 추산 2만여 명(경찰 추산 7000~1만명)의 시민들이 참여해 신논현역에서부터 강남역까지 도로 한쪽을 가득 메웠다.
이날 행사에 참가한 시민들은 제각기 독특한 모양의 시위 도구를 만들어 와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했다. 골판지 상자 조각로 만든 피켓, 신문지로 만든 새 모양 모자, 노란색 비닐로 만든 깃발 등 쓰고 남은 물품을 재활용해 만든 시위 도구들이 눈에 띄었다.
피켓에는 ‘기후 불평등 STOP’, ‘NO, 축산업! 우리도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원전 말고 안전’, ‘석탄화력 발전소 폐쇄, 공공재생 에너지로 총고용 보장’ 등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하는 목소리부터 동물권 보장과 원전 폐쇄‧정의로운 전환을 요구하는 내용까지 환경 문제와 관련한 다양한 문구가 담겨 있었다.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2018년 등교 거부 시위를 계기로, 세계 각국에서는 ‘기후행동의 달’이자 유엔총회를 앞둔 9월마다 대규모 기후위기 집회가 열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2019년 시작됐다. 올해로 네 번째다. 조직위에 따르면 2022년, 2023년에는 서울 남대문 인근에서 진행됐는데, 올해는 탄소 배출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대기업들의 사옥이 모여 있는 강남에서 행사를 열었다. 이날 행사는 서울뿐 아니라 대전‧부산‧제주‧포항‧지리산(산청), 통영 등 6개 지역에서도 동시에 열렸다.
“탄소배출 주범” 대기업 사옥 모인 강남에서 행사
골판지 피켓‧신문지 모자‧비닐 깃발…재활용 시위도구 등장
이날 행사에는 어린이와 청소년, 외국인, 타 지역민 등 다양한 연령과 인종, 지역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방과후 학교에서 만난 초등학생 아이들과 함께 피켓을 만들어 왔다는 서울 성북구의 한 시민은 아이들의 삐뚤빼뚤한 글씨가 쓰인 골판지 상자를 들어 보여 들었다. 피켓에는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는 문구와 함께 미소를 짓는 지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파란색 지구 모양의 모자를 쓰고 온 외국인도 보였다. 독일 출신이라는 그는 “기후위기가 세계에서 제일 큰 재난이라고 생각해 행진에 참가하게 됐다”고 말했다.
커다란 저어새 모양의 모자를 만들어 머리에 쓰고 온 시민도 있었다. 전북 군산시에서 왔다는 그는 “정부가 수라갯벌에 추진 중인 새만금 신공항 건설을 반대하는 의미에서 수라갯벌에 사는 멸종위기종 저어새 모양의 모자를 만들어 쓰고 왔다”고 말했다.

정록 907 기후정의행진 공동집행위원장은 이날 본집회에서 “노동, 인권, 여성, 환경, 반빈곤 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른 세상을 일구기 위해 분투해 온 우리는 기후정의운동으로 서로를 넘나들며 연결됐고 이렇게 모였다”고 말했다. 이어 “이곳 강남에서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바로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폭염‧폭우로 온열질환‧생계 위협 늘어나”
“어떻게 농사지어야 할 지 막막”
노동자‧농민‧지역민‧청소년…각계각층서 목소리 내
이들은 이날 오후 1시부터 오픈마이크 등 사전행사를 진행한 뒤 3시부터 본집회를 하고, 이후 강남역부터 삼성역까지 테헤란로를 따라 행진을 했다. 본집회에서는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노동자‧농민‧청소년‧지역민 등의 목소리를 전하는 이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강한수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 노동안전보건위원장은 이상기후로 폭염이 심화해 온열질환으로 쓰러지거나, 폭우로 생계 위협을 겪는 건설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호소했다. 또 그는 “신도시, 신공항, 발전소 등 개발 행위를 내심 바라는 것이 건설노동자들이기에 이 자리에 서는 게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러나 부정한 개발이익 앞에 서 있는 나쁜 굴착기가 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정의로운 전환을 요구하는 비정규직 발전노동자들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박규석 공공운수노조 발전HPS지부장은 “정부가 발표한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계획에 따라 비정규직 발전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지만 우리 노동자들 대부분은 기후위기로 인한 석탄발전소 폐쇄에 동의하고 있다”며 “하지만 그런 우리에 대한 고용대책은 현재까지 찾아볼 수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공공재생 에너지로의 확대로 발전 노동자의 총고용을 보장하는 정의로운 산업 전환을 쟁취하자”고 강조했다.

농민의 목소리도 나왔다. 신지연 여성농민회총연합 충남연합 사무처장은 “기후재난이 우리 농민에게는 일상이 됐다. 매년 농사를 짓지만 매년 어떻게 농사를 지어야 할 지 막막하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우리 정부의 농업을 살릴 정책이란 자본의 스마트스토어에 농업예산을 투여하고, 농산물 수입을 늘여나가는 것 뿐”이라며 “농업은 하나의 산업이 아니라 생명이 이어져온 우리 역사 그 자체다. 공장에서 생산하고, 다른 나라에서 돈 주고 편리하게 사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지역 환경문제도 언급됐다. 김현욱 가덕도 신공항반대시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이 좁은 국토에 전국 15개의 공항도 모자라 10개의 공항을 더 짓겠다고 한다”며 “모두 생태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신공항 건설을 멈춰야 한다”고 요구했다. 임희자 보철거를 위한 금강낙동강영산강 네트워크 집행위원은 “세종보는 4대강의 16개 보 중에서 유일하게 열려 있는 보인데 윤석열 정부가 이 세종보 재가동을 추진하고 있다”며 “세종보 수문 재가동은 금강의 죽음”이라고 비판했다.
최근 헌법재판소가 ‘탄소중립 기본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한 발언도 나왔다. 윤현정 청소년기후행동 활동가는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라며 “이 판결은 우리 사회의 최선이 아닌 후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우리 삶을 지킬 최저선을 함께 만들어 가자”고 강조했다. 지난달 29일 헌법재판소는 국가가 2031년부터 2049년까지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세워두지 않은 현행법(탄소중립 기본법)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본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신논현역에서부터 강남역, 역삼역, 선릉역을 거쳐 삼성역까지 행진했다. 행진 코스에는 구글코리아, 쿠팡 로켓연구소, 포스코센터 등이 포함됐다. 이들은 삼성역에 도착한 뒤 도로 위에 죽은 듯 드러눕는 ‘다이인’(die-in)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기후재난과 기후불평등에 항의하고 앞으로 다가올 우려스런 미래를 상징하는 퍼포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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